2019년 7월 25일 목요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골똘히 깊게 접근해 보면 이만큼 어려운 질문이 또 없다.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보았겠지만, 동시에 막상 길게 서술해보라 하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 것이다.

 내가 이 질문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소위 말하는 ‘중2병’이라는 것을 한참 겪고 있었을 때였는데, 도덕 선생님께서 도덕 수업 내용으로도 가르치셨고, 시험 문제로도 나와서 그 때 한참 고민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굉장히 질문에 몰두하여 중2 내내 살았던 기억이 있고, 결국에는 시험에서 글을 아주 잘 써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중학교 2학년 때보다는 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으로 이 질문에 답해야겠다는 모종의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따라서 최근에 읽어 본 내가 좋아하는 ‘마르크스’, 그리고 ‘라캉’이라는 철학자와 ‘구조주의’라는 개념, 그리고 각종 이상한 철학들을 들먹이며 서술해보고자 한다. (공부가 굉장히 아마추어적이었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이해와 인용 그리고 궤변이 난무함을 이 글을 읽을 여러분에게 미리 알려드리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답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겉으로’, 하나는 ‘속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겉으로’ 대답하자면, ‘나’ 라는 존재는 ‘김림’이라는 이름, ‘19살’이라는 나이, ‘남자’라는 성별. ‘XX고등학교 학생’ 이라는 신분 등으로 뻔하게 대답할 수가 있다. ‘속으로’ 대답하자면, ‘주체’, 또는 ‘객체’, ‘자아’‘타자’등 온갖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들며 세계와의 관계 등과 함께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라캉이라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는 S/s라는 기호를 내세우며 ‘기표’‘기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표’는 우리가 직접 삶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즉 인간이 감각으로서 체험하는 모든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얘기한다. 위에서 얘기한 ‘겉으로’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의’는 ‘그 속에 있는 무언가’를 얘기한다. 위에서 얘기한 ‘속으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비슷한 개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이 텍스트를 잘못 이해해서 올바르지 못한 인용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사유는 절대적으로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고, 감각은 절대로 깊은 곳 그 이상, 인간의 경험 그 이상에 닿아 현학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에는 매우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라캉은 아기가 생후 몇 달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모든 것을 무작위적인 덩어리, 즉 이미지로만 받아들이는 ‘상상계’를 거쳐, 거울을 보고 (거울은 문자 그대로의 거울일 수도 있고, 또는 엄마 등 타자의 얼굴이기도 한다) 처음으로 엄마와 ‘나’는 따로 떨어져 있으며 타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동시에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바로 ‘언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아기가 ‘언어’와 ‘텍스트’를 접하며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 순간, 아기는 어머니와 완전히 분리되게 되고, 비로소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규정되고, 인간은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에,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바로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한 사회의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인간관을 전개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결국 인간은 관계로서 규정되며 관계들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토대를 이룬다고 설명한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며 ‘나’를 주체로 오인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과 달리 그리 특출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주체’라는 것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자아와 주체의 인식은 오인에서 시작되는데, 그 상황에서 언어와 텍스트를 접하며, 이름이 붙여지고, ‘호명’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접하며 상징계에 접어든 순간부터 기표만을 인식하며, 기의에 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림’이라는 이름은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작명소에서 지어져 우리 부모님께서 그냥 적당히 붙여준 것, 즉 타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김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지만, ‘나’가 김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장소에 ‘김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잔뜩 모아놓고 다른 한 사람이 ‘김림’이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호명하는 줄 알 것이다. 그 상황에서만큼은 ‘나’는 ‘김림’이라는 특별한 주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 ‘19세’, ‘양업고등학교 학생’, ‘남자’라는 다른 기표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19세’, ‘양업고등학교 학생’, ‘남자’라는 기표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표만으로 우리 스스로와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경험하고 경험을 통해서 인식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관계와 관계들로 맺어지고 얽혀진 구조 속의 산물이다. 부모님과 부모님과의 관계, 나와 학교와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 나와 친구와의 관계 사이에서만 나는 존재하고 호명된다. 인간은 절대로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구상에는 70억 이상의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이 부모도 모르는 채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아예 사람들과의 접촉이 전무한 채로 평생을 살아간다면 몰라도, 관계와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 구조 속에서만 존재하고 인식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표들에 대한 ‘명명’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내가 불릴 호칭 등 또한 항상,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타자의 호명을 받아 나는 주체가 된다. (주체로 오인하게 된다.) 결국 타자에 의해 개개인이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주체화’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성경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호명됨으로써 신의 질서에 복속된 것과 굉장히 유사한 원리이다. (굳이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신’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연’, ‘우주’, ‘사회’ 등의 개념을 대입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구조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결국 ‘사랑은 의무적인가?’와 같은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도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어떤 대상을 다른 것보다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나 상태’ 등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본다면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사랑이 되게 된다. 인간은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접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냥 타자 A, B, C......이렇게 칭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됨은 그 사람을 다른 타자들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나 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사랑은 의무적인 것이 된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관계의 바탕은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를 낳고, 관계는 구조를 낳고, 구조는 또 다시 인간을 낳는, 이런 순환의 원리가 인간 세계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내가 너무 과도하게 극도로 회의적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면도 있을 수도 있다. 보통의 친구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가 누구지? ‘주체’와 ‘자아’는 뭐지? 등의 질문과 질문을 이으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마당에, 본인은 ‘주체’와 ‘자아’ 같은 것은 없고,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설사 ‘주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기표일 뿐, 진짜 나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와 같이 회의적이고 괴상한 사유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책 내용의 일부분과 사진을 접하면서 부터이다.


 이 사진은 우주탐사선 보이저 2호가 지구에서 무려 60여 억 km나 떨어진 지점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고 본인은 깨달았다. ‘아, 인간은 저 거대하고 방대한 우주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못한 존재구나! 열심히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구나!’
 그 때부터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책의 전체 요지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아주 심각한 오류였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저 사진을 예로 들며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삶의 터전이고, 인간만이 사유를 하고 문명을 꾸린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의 작동 목적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살자!...’의 요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잘못 짚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위에서도 굉장히 회의적이고 비약적인 서술을 하며 부정적인 사유를 전개한 본인이지만, 본인 스스로 이러한 사유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굉장히 반성하고 있다. 저렇게 극단적인 사유를 이어나가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냥 단백질과 탄수화물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에 불과하고, 인간은 아무 쓸모도 없다. 와같은 극단적인 유물론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내 글의 요지도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에 의해서만 주체화 되니까 나는 되게 쓸모없는 존재구나. 그냥 죽어버리자, 막 살자.’ 따위의 부정적인 요지가 아니라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에 의해서만 호명되며 명명되고 주체화 된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그 속에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기의, 즉 진정한 주체와 자아를 어떻게든 찾기 위해서 관계와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탐구하며 투쟁하자’는 요지였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본문의 내용에는 이러한 요지가 전혀 들어있지 않지만.)






----------------------------------------------------------------

이 글을 쓴게 2019년 2월 쯤이던가, 학교 철학 방과후 수업 과제로 썼던 글이다. 물론 질문에서 물어보는 것에는 답을 안 하고 이상한 말만 주저리주저리 써놔서 수업 담당 신부님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 놓기는 했다. 저때 나름 좀 어려운 텍스트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허위 의식에 절어 있었다. 문장은 단조롭고 딱 자기 할 말만 해야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다른 거 다 필요없이 항상 자기 할 말만 간결하게 한다.

글쓰는 사람

 요즘 문지에서 최근 출판한 김현 선생의 <사라짐, 맺힘>이라는 에세이집을 읽고 있다. 나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닮고 싶은 문인으로 유시민 같은 양반을 꼽았었다.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직접 실천한 문인이라서 닮고 싶다나 뭐라나. 그건 진짜 '뭘 모르고 했던 소리'였다. 문필가라면 응당 김현 선생 같은 분의 자세를 닮아야 한다. 벤야민도 좋고. 우리는 요즘 무언가에 쫓겨 사소한 것들을 놓치고 산다. 김현과 벤야민은 그런 '사소한 것들'에도 관심을 기울여 사유를 촉발시키고 멋드러지게 전개해나갔던 인물들이다. 그야말로 위대한 문필가들이다. 나도 저 분들을 닮고 싶지만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9년 7월 24일 수요일

이놈의 블로그 다루기 조낸 어렵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구글님들아

단순한 인터페이스는 좋은데 너무 단순하잖아

단순한 걸 넘어서 심하게 말하면 허접함.

폰으로 볼 때랑 PC로 볼 때랑 다르고

업로드한거 일일이 다 수정하다가 귀찮아서 포기함.

사실 글들 전부 다 다른 곳에 썼던 것들 복붙해서 올리는건데

그냥 졸라 이상함

귀찮아서 가독성 포기함

읽으시는 분들 불편하실텐데 죄송합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A Brighter Summer Day, 에드워드 양, 1991)을 보고


 1

 고작 영화 한 편. 영화 한 편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재현하고자 노력해도, 이미 카메라로 시점을 정하고 편집을 하는 순간 현실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이다. 이런 한계를 직시한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단순한 유흥거리가 되어 있었다. 깊이를 가진 척만 하는 영화들. 가짜 경험을 재생산하고, 시대의 아픔을 스펙터클의 소재로만 사용하는 작가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이 영화는 4시간 동안 (영화의 긴 러닝타임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영화적 체험'을 전한다.


 2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해져야하며, 현재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여야' 한다. <고령가>는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에 충실한 영화다.


 3

 1960년대 초의 대만은 너무도 불안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로 중국은 수난의 근대사를 겪었다. 8년 동안이나 일본군과 전쟁을 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전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결국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산당을 피해 대만으로 도망 왔다. 대만이서는 국공내전으로 인해 피난 온 외성인, 수백 년 전부터 대륙에서 건너와 대만에 거주하던 본성인, 대만 섬의 원주민들이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것뿐인가, 권위적인 장제스는 스스로 총통 직에 올라 공산당의 토벌을 논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했으며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의 역사 속에서, 청소년들은 부모 세대의 불안감을 그대로 답습했다. 당시 대만의 청소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을 뿐이다. 공부를 잘해서 엘리트 계층에 편입되거나, 폭력조직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거나. 대만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랑의 역사'였다. <고령가>는 이러한 60년대 대만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마치 영화는 관객들에게 '대만의 역사를 공부하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를 보지도 못할걸?' 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공산당에게 대륙을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한 후 국민당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그는 말년까지 '대륙 회복'에 대한 희망 아닌 망상을 놓지 못했다.

 4

 14살의 내성적인 소년 샤오쓰는 낮은 국어 성적 때문에 중학교 주간부에서 야간부로 옮긴다. 소년은 야간부에 다니며 '소공원파'라고 불리는 소년 갱단원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러던 중 소년은 우연히 소녀 밍을 만난다. 소년은 소녀에게 반한다. 하지만 소녀는 '소공원파'의 보스 허니의 여자였으며, 허니는 밍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 조직 '217파'의 보스를 죽이고 은둔해있는 상태였다. 보스의 부재로 통제력을 상실한 '소공원파'와 '217파'의 대립은 격해진다. 소년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꼽는 이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 짧은 장면이지만 사춘기 소년의 섬세한 감정을 뛰어난 감성으로 표현한 감독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5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장장 4시간에 달한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다. 상식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4시간 동안 샤오쓰의 이야기, 밍의 이야기, 샤오쓰의 가족들의 이야기, 폭력조직들 간의 암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만큼 등장인물들도 십 수 명이 넘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허비되는 장면이나, 대사나, 이야기나 등장인물들은 '하나도' 없다. <고령가>는 각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하며 4시간 동안 시종일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비록 영화가 14살의 소년 샤오쓰를 주인공으로 두고 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들과 거리를 두며 개개인의 삶과 사건의 흔적과 시대의 공기만을 영화에 담아낸다.


주인공 '샤오쓰'(장첸 분)와 그의 귀여운 친구들. <고령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 허비되는 캐틱터는 단 한 명도 없다. 

 6

 <고령가>는 '거리를 둔' 이야기이다. 주인공 샤오쓰는 '소공원파' 패거리와 어울리지만 '거리를 둔'다. 밍을 좋아하게 되지만 그가 전설적인 폭력배 허니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마찬가지로 '거리를 둔'다. 하지만 허니가 복귀하고 샤오쓰가 그를 친형처럼 따르게 된다. 허니는 상대 조직 '217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허니의 복수와 밍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든다. 결국 샤오쓰는 퇴학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어버리는데 설상가상으로 밍이 '장군의 아들'인 친구 샤오마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다. 폭력이 내재된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와 개인의 쓰라린 사정들은 결국 샤오쓰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폭발시킨다. 영화 는 내내 '거리를 두'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이야기와 거리를 둘 수 없게 된다.



샤오쓰는 정말로 밍을 '사랑'한걸까. 어쩌면 샤오쓰에게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위안받기 위해 우상화할 대상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7

 제목에도 '살인사건'이 들어가지만 영화에서 살인사건은 정작 맥거핀에 가깝다. 이 영화가 뛰어난 이유이다. 시대가 가진 폭력이나 아픔을 말초적인 자극을 가하는 스펙터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내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는 '관조하는' 영화이다. <고령가>는 언뜻 보면 시퀀스마다 그리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서사를 유려하게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는 사건이나 순간을 기록한 풍속화나 풍경화에 가깝다. 샤오쓰 가족 개개인의 사연, 아버지와의 각별한 관계, 폭력 조직원들 개개인의 사연과 드라마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펼쳐지기 때문에 주인공 개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고 하는 시도는 소용없다. 각 장면장면을 분절된 몽타주로 봐도 좋을 정도인데, 이 개별적인 사건과 장면들은 영화의 종지부에서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듯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4시간의 대장정의 끝에서, 우리는 슬픔, 안타까움, 애처로움 등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고령가>는 '비극'이다. 시대의 불안이 잠식한 소년의 삶을 다룬 비극.


샤오쓰와 아버지 간의 애틋한 관계. 그러나 결국 가족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침몰해버린다.

 8

 위에서 얘기했듯이 영화는 절대로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도 영화를 담아낼 수는 없다. 세계의 유수한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남겼다. 허나 그들 모두가 글로는 이 영화를 다룰 수 없다고 했다. 예전에 정성일이 이 영화를 보고 7시간 동안 강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로도 부족했다. <고령가>를 글로 다루려면 수백만 장이 넘는 글이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의 대만으로 날아갈 노릇 밖에는 없다. 우리는 영화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는 없다. 이 영화가 아무리 오래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이미 해묵은 영화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영화가 역사, 기억, 시대, 감정, 현재를 묘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령가>에서는 '전등'이 유난히 부각된다. 전등을 켬으로써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발버둥쳤던 소년은 결국 스스로 전등을 깨버리고 어둠 속에 잠식되기를 선택했다.

 9

 글이 꽤 길어졌다. 내내 써놨듯이, 백문이 불여일견. 수많은 유수의 평론가들의 글들을 읽어봤자 이 영화에 닿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이 영화를 담아낼 수는 없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써놨는데도 아직 할 말이 태산이다. 나는 여기서 글을 줄이겠다. 내가 유수의 평론가도 아니고, 이 글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가 본받아야 할 모든 자세와 방식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4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나 대만의 복잡한 근현대사가 <고령가>를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런 어려움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인생의 하루를 기꺼이 바쳐도 되는 영화이다. 물론 대만인만이 완벽하게 공감하겠지만, 시대와 역사가 가진 폭력과 아픔을 아는 한국인들은, 다른 외국인들보다도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의 현대사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픈 역사와 기억을 대하는 태도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그 태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영화는 과연 '진짜'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진짜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에드워드 양은 현실에 한없이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낸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해 여름은 무더웠네

<여름 이야기>(A Summer's Tale, 에릭 로메르, 1996)를 보고

이제 막 여름이 시작되는 터라 괜히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20여 년 전 영화이지만, 세련된, 소위 ‘힙한’ 영화였다. 알게 모르게 ‘쿨한’ 줄거리도, 배우들의 옷차림새도, 상쾌하고 몽환적인 영상미도 모든 게 완벽한 영화였다.

 영화의 주인공 ‘가스파르’는 수학을 전공했지만 음악가가 꿈이다. 어찌 보면 수학과 음악은 별 차이가 없다. 작곡도 결국에는 음표를 수학적으로 ‘잘’ 배치시키는 일이니까. ‘가스파르’는 휴양지에서 세 명의 여자와 아슬아슬하게 썸과 연애 사이의 줄타기를 한다. 결국에는 셋 모두와 데이트 약속을 잡아버리고야 말고 혼자서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가스파르는 능력자일까, 윤리적 지탄(?)을 받아야 하는 악인(?)일까?

 로메르의 영화는 홍상수와 닮아 있다. 아니, 홍상수의 영화가 로메르와 닮아 있다고 해야하는게 맞다. 허나 홍상수와 로메르의 영화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과의 ‘거리’이다. 홍상수와 로메르의 남주인공들은 대체로 찌질하며,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족속들이다. 홍상수의 남주인공들은 실제로 만나면 진짜 한 대 패주고 싶을 정도로 밉게 느껴진다. 허나 로메르의 남주인공들은 똑같이 밉고 찌질하지만 싫어하고 싶지는 않은 인물들이다.


홍상수의 첫 영화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의 주인공 '효섭'(김의성 분)은 그야말로 '인간 쓰레기'이자 '루저'다.


 그래서 <여름 이야기>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가스파르에게 휘둘린 세 명의 여자도, 영화의 서사 상 명백한 주인공인 가스파르에게도. 작금의 로맨스 영화들은 이른바 ‘감정과잉’에 극도로 시달리고 있다.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에 대한 화두가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등장하면 수지의 편과 이제훈의 편으로 갈려 남녀가 열심히 싸운다.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면서. 허나 <여름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저지르면서 역설적이게도 자기 혼자서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버리는 주인공을 덤덤한 연출로 ‘제시’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길게 남긴다. 덕분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연애’가 과연 뭘까, 남녀 사이란 왜 이렇게 아슬아슬하고도 어려울까, 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영화란 마침표를 찍는 영화보다 물음표를 찍어주는 영화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영화였다.


여름은 너무도 무덥다. 그래서 우리는 가스파르를 매도할 수가 없다.

학습된 증오에 잠식당하는 사랑, 불행한 연인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li: Fear Eats The Soul,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를 보고

 주인공 ‘에미’는 장성한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청소부 일을 하며 외롭게 근근이 살아가는 60대 여성이다. 에미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들을 모두 건실히 키워낸 굳건한 여성이지만, 나이들어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완전히 사라진 채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소외자이다. 어느 날 그녀는 술집에 들렀다가 ‘알리’를 만난다. ‘알리’는 모로코에서 건너온 카센터에서 일하는 젊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그 역시도 “독일인은 주인, 아랍인은 개” 라는 독일 사회의 암묵적인 차별과 냉소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소외자이다. 둘은 춤을 추며 깊은 대화를 나누다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어 마법같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나가 결혼에 이르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아파트 이웃들은 에미가 외국인이랑 놀아난다며, 에미가 ‘쿠로프스키’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으니 순수 게르만인이 아닐 것이라며 수근대고(사실 에미는 남편이 폴란드계였기에 폴란드계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인데도), 직장 사람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에미를 따돌리며, 자녀들은 자신의 결혼을 알리는 에미에게 크게 분개하며 어머니를 “창녀, 돼지, 걸레” 등으로 비하하고 에미의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까지 한다.
 에미는 알리와 사랑하며 전에 느껴본 적 없던 행복함을 느끼지만, 오히려 사회의 차가운 시선으로 인해 극도의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알리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백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알리는 아랍인 친구들과 멀어지며, 술집에서 어울리던 다른 친구들에게도 노골적인 적대감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주위의 혐오 섞인 차가운 시선은 두 사람이 도피성 여행을 다녀온 뒤로 따듯한 시선으로 뒤바뀐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각자의 이익만을 위한 위선일 뿐이고, 인간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에미의 자식들은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대뜸 어머니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집 앞 슈퍼마켓 주인은 고객을 잃어 매출이 줄었기에 에미에게 다시 친절하게 대하며, 직장 동료들은 유고슬라비아인 노동자가 새로 들어왔다며 에미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며 따돌림에 동조하게 만든다.
 이렇게 불행이 다시 행복으로 바뀐 듯 한 순간 정작 둘의 관계에 마찰이 찾아온다. 주위 사람들에게 동화되어버린 에미는 알리를 은연중에 열등한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하고, 알리는 자신이 결국 사람들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타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옛 애인에게 돌아가 외도를 저지른다. 에미는 알리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알리 역시도 거울을 바라보다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둘은 화해하게 된다. 에미와 알리는 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들으며 춤추고, 자신들에게 다시 다가올 행복에 젖을 생각에 취하지만, 알리는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이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주 걸리는 불치병인 위궤양에 걸렸고, 병상에 누워있는 알리를 에미가 쓸쓸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1974년 뉴저먼시네마 사조의 기수라 불리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파스빈더 감독은 1950년대 전형적인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줄거리, 편집, 조명, 촬영기법이라는 틀을 차용해 거기에 브레히트가 제시한 소외효과를 더해 ‘사회비판적 멜로드라마’ 라는 독특한 장르를 제시하며 2차대전 이후 독일 사회에 내재된 파시즘과 사람들의 위선을 공격하고 있다. 주인공 에미가 2차대전기 나치당원이었다며, 그 때는 모두가 당원이었다고 알리에게 고백하는 부분이나, 에미의 사위가 터키인 에게 꾸중을 듣는다는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를 공공연하게 혐오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분은, 독일을 휩쓸었던 파시즘의 광풍은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독일인들의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내재되어있었음을 보여준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는 제목이 굉장히 심오하면서도 독특한데, 이는 아랍의 속담이다. 원제목 'Angst Essen Seele Auf'는 알리가 자신의 서툰 독일어로 자기 나라의 속담을 통해 에미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 말인데, 독일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독일어는 동사 변화가 굉장히 복잡한 언어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내포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았을 때, 이렇게 어법적으로 틀린 제목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외국인이 복잡한 어법을 가진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어렵듯이 알리 역시도 독일 사회의 문화와 법칙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음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2차대전 후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대중문화 (특히 영화) 가 공유하는 공통된 코드를 가지고 있다. 에미가 자녀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추축국 국가들의 전후 대중문화 속에서 비슷하게 내포되는 상실감과 우울함이라는 공통된 코드이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모두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 국가라는 이유로 국제 사회에서 묘한 따돌림을 겪게 되었고,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불러 일으켰던 광풍은 사람들의 의식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의 인명 살상과 경제의 불황은 사람들을 모두 피폐하고 궁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은 전후 복구 신화를 세우며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이탈리아는 강대국의 반열에 다시 오르지 못했지만 전후 복구를 착실히 해나갔던 나라이다. 그러나 이런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 속에 깊은 모순을 생겨나게 했으며, 자연스럽게 세 나라 모두 혼란스러운 현대사를 겪게 된다는 역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세 국가를 휩쌌던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광풍은 전후에도 사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었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단점인 막연한 감상주의에 빠지기 않기 위해 중간중간 느닷없이 긴 침묵을 첨가하는 연출, 인물들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극적인 상황 전개, 영화에 줄곧 내포되는 ‘불안감’과 ‘억압’을 시각화하는 대비되는 색상과 의도적으로 좁고 답답한 장면의 연출은 이 영화가 단 15일 만에 제작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게만 한다.

두 인물의 의상의 대비되는 색상과 안 그래도 좁은 아파트를 더 좁게 연출하여 억압을 시각화하는 카메라 앵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뛰어난 영화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치밀한 미학적, 영화적 완성도, 그리고 70년대 뉴저먼시네마라는 하나의 사조를 이끌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있지만,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독일의 신화, 그 뒤에 숨어있던 독일 사회의 위선과 소외된 계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영화가 만들어진지 4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진행형, 또는 심화중인 독일의 외국인 노동자(또는 난민) 문제를 선구적으로, 그것도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영화가 내내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 같은 것을 내려주지 않았던 부분은 약간 아쉽지만, 파스빈더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냉랭하고, 사랑의 완성도 구원도 희망도 그저 헛된 꿈에 불과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을 영화 속에서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복기할 만한 고민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이유일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감지하는 이상으로 잔인하다. 이들은 끝끝내 진실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첫 글

첫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감이 안 잡힌다.

초등학생 때 블로그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그땐 블로그에 별의별거 다 올리면서 블로그질 열심히 했다. 중학교 올라가면서 페이스북을 하게 됐고,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인스타그램을 하게 되면서 블로그는 자연히 내 기억 속에서 멀어져갔다.

구글 블로그를 새로 연 이유는 무엇이냐. 그냥 내 맘에 들어서다. 네이버 블로그는 너무 옛날(?) 느낌이 났다. 난 그냥 단조로운 것을 원한다.

이 블로그에는 그냥 잡얘기들이 올라올 거다. 딱히 구경할게 있으려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골똘히 깊게 접근해 보면 이만큼 어려운 질문이 또 없다.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보았겠지만, 동시에 막상 길게 서술해보라 하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 것이다.  내가 이 질문을 처음 맞닥뜨렸을 ...